제목 유래 - 張장~晉진 작성일 2004-06-08

張 - 장씨

우리 나라 장씨는 중국에서부터 왔다는 것이 통설이다.

고려를 세울 때 일등 공신 노릇을 한 장정필, 덕수 장씨 시조 선무 장군 장순용, 절강 장씨의 시조 장해빈, 이렇게 세 사람의 장씨가 우리 나라 장씨를 전국에 살게 한 원조라는 이야기이다.

이 밖에도 신라 시대의 장보고를 비롯해 장변, 장건영, 장빈, 장무, 장밀 등 숱한 장군과 학자들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고려사 등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장씨는 현재 우리 나라 각 성씨 가운데 9번째로 많다.


張 - 구례 장씨

시조는 악. 원시조 장정필의 21대손. 고려 때 시종으로 있으면서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70세 때 다시 벼슬을 하여 궁궐로 들어갈 때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보이자 임금이 물었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나고 자란 곳이 봉성인데 그 곳을 못잊어 그러하옵니다."

그 말을 들은 임금은 즉시 봉성군에 봉하였다. 봉성이 나중에 구례로 이름이 바뀌어 지게 되자 장씨의 본관이 되었다.


張 - 안동 장씨

시조는 정필. 본래 중국 절강성에서 대사마 장군 원의 아들로 888년에 태어나 5세 때 아버지를 따라 우리 나라로 왔다.

18세 때 중국으로 파견하는 정사를 따라 당 나라에 들어가 그곳에서 공부하고 24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고려 왕건이 나를 세울 때 일등 공신이 되고 안동군에 봉해져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張 - 덕수 장씨

시조는 순용. 1275년 고려 충렬왕 때 충렬왕비인 원 나라 세조의 딸 제국 대장 공주를 따라 우리 나라에 와 덕수현에 살았다.

고려에서 문하찬성사 벼슬을 지내고 덕수부원군이 되었으므로 그 때부터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여 덕수를 본관으로 정하였다.

후손은 50대에 이르고 있다.


張 - 인동 장씨

시조는 김용. 장정필의 후손으로 고려 때 상장군 벼슬을 하고 인동에 머물면서 인동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후손들이 장정필을 도시조로, 김용을 시조로 삼고 인동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인동 장씨는 종파, 황파, 청주파 등 17개 파로 갈라져 42대까지 내려왔다.


張 - 절강 장씨

시조는 해빈. 본래 중국 항주 오강현 지방 사람으로 정유재란 때 유격 장군인 오유층의 부하 장군으로 우리 나라에 와서 울산의 중성 싸움에 나섰다가 유탄에 맞아 귀국하지 못하고 군위에 머물러 치료를 받았다.

그 뒤 후손들이 고향인 절강을 본관으로 삼고, 장해빈을 시조로 정하였다.


張 - 창녕 장씨

시조는 천익. 정필의 후예로서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1228년 고종 대 승평 판관이 되었다.

그 뒤에 직사관을 거쳐 전중시어사로 몽고에 사신으로 두 차례나 다녀왔다.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고 동지중추원사가 된 뒤, 창녕군에 봉해져 창녕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 밖에도 결성 장씨, 나주 장씨, 단양 장씨, 목천 장씨, 부안 장씨, 순천 장씨, 예산 장씨, 옥구 장씨, 울진 장씨, 전주 장씨, 지례 장씨, 진안 장씨, 진주 장씨, 진천 장씨, 청송 장씨, 흥덕 장씨, 흥양 장씨 등이 있다.


蔣 - 아산 장씨

시조는 장서. 중국 송 나라 때 경위대장군으로 나라 안이 어지러워지자 이강과 함께 평화론을 주장하다가 뜻대로 안 되어 배를 타고 우리 나라 아산에 도착, 그 곳에 정착하였다.

조정에서는 아산군에 봉했는데, 이로 인해 아산을 본관으로 하여 아산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全 - 전씨

전씨는 문헌에 178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감천, 경주, 기장, 정선 등 17본을 제외하고는 기록이 거의 없다.

모든 전시는 백제 개국 공신인 전섭을 원조로 삼고 있다. 전섭은 동명성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10명의 막료들을 데리고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세울 때 공을 세운 10제공신 가운데 한 사람이다.


全 - 감천 전씨

시조는 전언. 백제 온조왕 때 10제공신 전섭의 30대손이다.

그는 고려 충숙왕 때 밀직부사 등을 지냈고, 좌명 공신으로 감천군에 봉해져 감천 전시의 시조가 되었다.

감천은 안동현에 속한 땅이라 안동 전씨라고도 한다. 후손은 83대손에 이르렀다.


全 - 성산 전씨

시조는 전홍. 원조 전섭의 26대손으로 고려 때 판도판서를 지냈고 고종 때인 1231년 몽고의 철례탑이 침입해 오자, 이를 맞아 용감히 싸우고 큰 공을 세워 서산군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성산을 본관으로 삼고, 그를 시조로 섬기며, 강화군 인산리에 있는 원모제에서 해마다 10월 10일 시향을 지낸다.


全 - 완산 전씨

시조는 전집. 원조 전섭의 30대손으로 고려 공민왕 때 중랑장이 되어 두 차례나 홍건적을 물리치는 공을 세워 완산백에 봉해졌다.

그의 후손들이 완산을 본관으로, 전집을 시조로 삼았다. 지금 후손들은 크게 번성하여 82대에 이르고 있다.


全 - 정선 전씨

시조는 전섭. 중시조는 전선. 우리 나라 모든 전씨의 유일한 원조이다.

전섭은 고구려 동명성왕의 셋째 아들 온조를 따라 부여로 내려와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10제공신의 한 사람이다.

그의 8대손인 선이 신라로 가서 벼슬을 얻어 정선군에 봉해져 정선을 본관으로, 정선 전씨의 시조가 되었다. 후손은 100대에 이르렀다.


全 -함창 전씨

시조는 전살리. 전섭의 29대손으로 고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형부상서를 지냈고 좌리 공신으로 함창군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정선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함창을 본관으로 삼고, 계통을 이어와 지금 80대에 이르렀다.


이 밖에도 경주 전씨, 기장 전씨, 나주 전씨, 성주 전씨, 옥산 전씨, 옥천 전씨, 용궁 전씨, 죽산 전씨, 천안 전씨, 팔거 전씨, 평강 전씨, 황간 전씨 등이 있다.


田 - 전씨

문헌에는 142본으로 되어 있으나, 남양, 담양, 연안, 영광, 하음 전씨르 제외하고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남양 전씨는 중국의 후손이고, 담양 전씨는 고려 대의 전득시 후손이며, 연안, 하음 전씨는 담양 전씨에게서 갈라진 것이며, 영광 전씨는 고려 개국 공신 전종회의 후손이다.


田 - 남양 전씨

시조는 전풍. 중국의 한림학사로 송 나라와 원 나라 때 임금들의 행적을 기록하는 일을 잘못했다 하여 쫓겨나자 우리 나라로 건너왔다.

고려에서 송 나라에 대한 그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남양군에 봉해준 것이 남양 전씨의 시조가 되었다.


田 - 담양 전씨

시조는 전득시. 고려 때 현양으로 천거되고 문과에 급제하여 좌복사참지정사 벼슬에 올라 담양군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담양을 본관으로 삼고 계통을 이어 지금 47대에 이르고 있다.


田 - 연안 전씨

시조는 전가식. 전득시의 9대손으로 조선 정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 벼슬에 올라 영의정을 지내고 연안군에 봉해졌다.


田 - 영광 전씨

시조는 전종회. 고려 개국 공신으로 운기 장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 후이 기록이 분명하지 못해 전개를 1세로 정하고 본관을 영광으로 하여 계통을 이어오고 있다.


田 - 하음 전씨

시조는 전균. 1453년 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을 벌할 때 공을 세워 하음군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담양 전씨에서 갈라져 나와 하음을 본관으로 삼았으나, 북한에만 후손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錢 - 문경 전씨

중국 팽성 사람. 황제의 손자인 전옥의 후손이 우리 나라에 귀화하여 시조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문경 전씨는 전유겸이 사신으로 들어와서 최영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문경으로 내려가 문경 전시의 시조가 되었다.

전씨의 후손으로는 대한민국 초대 사회부 장관과, 1,2,3,5,6,대 민선 의원을 지낸 전진한이 있다.


鄭 - 정씨

문헌에는 210본으로 되어 있으나 30여 본을 제외하고는 기록이 정확하지 못하다.

정씨의 원조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6촌장 가운데 자산 진지촌의 촌장인 지백호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 정씨는 서산과 낭야 정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지백호의 후손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 성씨 가운데 5위에 올라 있다.


鄭 - 경주 정씨

시조는 지백호. 경주 화산에 내려와 부족 구가이던 삼한 시대의 진한, 사로 등 6촌장 중에 으뜸으로 동남쪽에 자리잡은 진지부의 촌장이 되었다.

기원전 57년 박혁거세를 임금으로 추대하고, 나라 이름을 신라라고 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로 인해 건국좌명공신이 되고 서기 32년 유리왕 때 진지부가 본피부로 바뀌면서 낙랑후에 봉해지면서 정씨 성을 하사받았다.

그의 후손인 정진후가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평장사 등 벼슬을 지낸 뒤 경주군에 봉해져 본관을 경주로 하는 정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鄭 - 서산 정씨

시조는 인경. 중국 송 나라에서 판장작감을 지낸 웅충의 후예로, 웅충의 손자 신보가 송 나라가 망하자 우리 나라로 망명하여 서산에 정착하였다.

신보의 아들 인경은 고종 때인 1254년 문과에 급제하여 충렬왕이 세자로 원 나라에 머물 때 수행했으며, 충렬왕이 귀국하여 임금에 오를 때 이등 공신이 되었다.

그의 후손들이 서산을 본관으로 하여 지금 40대에 이르렀다.


鄭 - 연일 정씨

시조는 습명. 고려 의종 때 충신으로 추밀원 지진사를 지내고 연일현백에 봉해졌다.

원래 연일 정시의 원조는 신라 6부 시대의 지백호인데, 그 뒤의 기록이 없어 지백호의 원손인 종은을 중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 습명을 1세로 삼아 지금 33대에 이르렀다.


鄭 - 진주 정씨

원조는 지백호이나, 기록이 없어 시조를 달리하는 진주 정씨가 8파나 되어 진주 8정 또는 진양 8정이라고 한다.

그 후손들이 영절공 정예를 진주 정시의 시조로 하여 통일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을 뿐이다.


鄭 - 초계 정씨

시조는 배걸. 고려 현종 때인 1017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부상서, 중추원사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유가의 대가를 이루었다.

나중에 초계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초계를 본관으로 삼았다. 사공파, 상도파 등 9개파로 갈라져 40대에 이르렀다.


鄭 - 하동 정씨

하동 정씨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계통이 다른 3파가 있는데, 삼한 말기의 정도정, 고려 개국 초기의 공신 정웅, 지백호의 원손 정손위의 3파이다.

그 밖에도 고성 정씨, 곤양 정씨, 광주 정씨, 김포 정씨, 나주 정씨, 낭야 정씨, 동래 정씨, 봉화 정씨, 서경 정씨, 야성 정씨, 영덕 정씨, 예천 정씨, 온양 정씨, 장기 정씨, 전주 정씨, 정산 정씨, 정주 정씨, 청산 정씨, 청주 정씨, 함평 정씨, 해주 정씨 등이 있다.


丁 - 압해 정씨

시조는 덕성. 본래 당 나라 문종 때 대승상을 지냈고, 무종 때 대양군이 되었으나 선종 때 압해로 밀려나 살다가 우리 나라로 건너왔다.

영광파, 창원파, 나주파, 의성파 등으로 갈라졌다.


程 - 하남 정씨

시조는 정사조. 중국 황제 헌원의 후손으로 그의 138대손인 사조가 노국 공주를 따라 우리 나라로 들어와 고려 충정왕 때 전중시어사를 지냈고, 공민왕 때 한산군에 봉해졌다.

그 뒤 후손들이 정사조의 고향인 중국 하남을 본관으로 삼아 46대에 이르렀다.


諸 - 철원 제씨

시조는 제갈충. 중국 제각무후량의 증손자로 13세 때 신라로 들어와 지리산 기슭에 정착하였다.

그 뒤 고려 현종 때 후손인 제갈영이 제갈홍과 제갈형 두 아들을 두었는데, 현종이 큰아들 제갈홍은 남양군에 봉하여 제씨 성을, 작은 아들 제갈형은 낭야군에 봉하여 갈씨 성을 주었다.

고려 충선왕 때 제갈홍의 8대손인 제문홍이 공을 세우고 철원부원군이 되어 철원 제씨가 되었다.


諸葛 - 남양 제갈씨

시조는 제갈규. 중국 사람으로 우리 나라로 망명하여 지리산 기슭에 정착하였다.

그의 후손들이 제갉의 고향 남양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제갈규의 원손인 공순이 우리 나라로 건너왔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제씨와 갈씨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趙 - 조씨

문헌에는 210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고려 때의 평장사를 지낸 조상을 원조로 하는 풍양 조씨를 비롯한 15본 정도를 제외하고는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

조선 시대 명성을 떨친 명문 가문의 하나로 꼽힌다. 그 가운데서도 풍양, 한양, 양주, 평양, 임천, 백천, 함안, 옥천, 횡성 조씨 등이 유명하다.


趙 - 백천 조씨

시조는 지린. 송 나라 태조의 손자로 난을 피해 우리 나라로 들어와 황해도 백천에 정착하였다.

고려 현종 때 참지정사에 올랐고, 그의 아들 양유는 덕종과 정종 때 판위위사승 벼슬을 지낸 뒤 문하시중으로 백천군에 봉해져 백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 뒤 42대에 이르고 있다.


趙 - 양주 조씨

시조는 잠. 고려 시대 양주 호장통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나, 자세한 기록은 없고, 1453년 정유재란 때 후손들이 잠을 시조로, 본관을 양주로 하여 계통을 이어간다.


趙 - 옥천 조씨

시조는 장. 본래 중국 전욱의 후예로 조부가 주 나라 때 공을 세우고 조성에 봉해지면서 조씨가 되었다고 한다.

조씨가 언제 우리 나라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고려 시대 검교대장군, 문하시중을 지낸 장을 1세로 하였으며, 그의 증손자 원길이 전공판서로 옥천부원군이 되어 옥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趙 - 임천 조씨

시조는 조천혁. 송 나라 태조의 손자 기왕의 다섯째 아들로, 서두공봉관 벼슬을 지내다가 태종이 임금이 되자 삼촌 유고와 함께 우리 나라로 와, 이름을 천혁이라 하고 임천에 정착하였다.

그 뒤 강감찬과 함께 거란군을 무찌르는 데에 앞장서 큰 성과를 올리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임천백에 봉해지게 되자, 임천 조씨의 시조가 되었다.


趙 - 풍양 조씨

시조는 맹. 어릴 때 이름은 바위. 고려 왕건이 나라를 세울 때 공을 세우고 문하시중평장사 벼슬을 하고 맹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가 머물러 살던 천마산 기슭에는 왕건 태조를 처음 만났다는 암굴이 있는데, 견성암이라는 절을 세워 암굴을 보존하고 있다.

전직공파, 호군공파, 회양공파 등 여러 파로 갈라졌다.


趙 - 한양 조씨

시조는 지수. 기록에 의하면 중국 주나라 몽왕이 서언왕을 정벌할 때 그의 할아버지가 공을 세워 조성에 봉해질 때 조씨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그 뒤 후손들이 조선을 세울 때 공을 세우고 많은 공신, 학자들을 배출하면서 본관을 한양으로 하였다.


이 밖에도 김제 조씨, 밀양 조씨, 직산 조씨, 진보 조씨, 태원 조씨, 평산 조씨, 평양 조씨, 함안 조씨, 횡성 조씨 등이 있다.


早 - 창녕 조씨

시조는 계용. 신라 진평왕의 사위이다. 그의 어머니는 창녕에서 한림학사의 딸로 태어났는데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졌다.

어느날 꿈에 금관을 쓰고 옥대를 한 남자가 나타나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 아기의 아버지는 동해용왕의 아들이다. 아이를 잘 기르면 크게 부귀영화를 누리고 자손도 번창할 것이다."

꿈에서 깨어보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뒤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계용이다.

그 아이의 겨드랑이 밑에는 한문으로 조씨 성자가 새겨져 있어 임금께 아뢰어 조씨 성을 하사받고, 뒤에 임금이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周 - 상주 주씨

중국 주 나라 37대 임금인 난왕의 후예들이 나라가 망한 뒤 주씨 성을 가졌다고 한다.

주씨는 상주 주씨, 안의 주씨, 철원 주씨, 초계 주씨가 있으나 모두 난왕의 후손에서 갈라졌다.

상주 주씨의 시조는 주이로, 신라 원성왕 때 우리 나라에 왔고, 철원 주씨 시조는 송관으로 당 나라에서 벼슬하다가 신라로 들어왔으며, 초계 주씨의 시조는 주황으로 신라 때 귀화하였다.


朱 - 신안 주씨

시조는 잠. 중국 전욱의 후세인 조협을 주 나라 무왕이 주국에 봉하면서 주씨 성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 뒤 주자의 후손인 잠이 우리 나라로 건너와 신안 주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뒤 나주, 전주,함흥 등 여러 곳을 본관으로 써 오다가 고종 때인 1902년 상소를 올려 잠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신안으로 통합하였다.


池 - 진주 지씨

시조는 경. 중국 홍능 사람으로 960년 고려 광종 때 우리 나라로 와 평장사에 이르고, 그 뒤 6대손 종해가 충주에 살면서 문화시랑평장사로 충원백이 되었다. 후손들이 충주를 본관으로 정하고, 46대에 이르렀다.


秦 - 진주 진씨

시조는 전욱. 전제의 후손으로 백익이 순제로부터 영씨 성을 하사받았으나, 그의 후손 비자가 진이라는 고을에 봉해져 진씨로 바꾸었다.

진씨의 시조 진상은 공자의 제자로서 우리 나라 문묘에도 올라 있다.

진상의 76대손인 진욱이 고려 때 박사 보리공신이 되어 진주군에 봉해져 진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한편 진필명을 시조로 하는 통기 秦씨도 있다. 진필명은 당 나라 태원 사람으로 신라에 와 백제를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풍기 땅에 정착하였다.


陣 - 여양 진씨

시조는 총후. 중국 송나라 때 진수가 주윤 벼슬을 지내다가 난리가 일어나자 우리 나라로 피신하여 여양에 머물러 살았다.

그의 후손인 총후가 고려 예종 때 신호위대장군 벼슬을 하였고, 인종 때 이자겸의 난을 평정하여 여양군에 봉해져 여양 진씨의 시조가 되었다.


晉 - 남원 진씨

시조는 함조. 10세 때 문장과 도덕에 뛰어났고, 천문과 수학에 조예가 깊다고 소문이 나, 고려 현종이 이를 불러 궁궐에 머물게 하면서 스승으로 삼았다.

그 뒤 호부상서 벼슬을 하고 진씨 성을 하사받았다. 함조의 후손 석이 고종 때 거란족을 내쫓고 남원군에 봉해져 남원 진씨의 시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