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유래 - 阿아~林임 작성일 2004-06-08

阿 - 아씨

삼국유사에 보면 역사적인 인물이 있다.

백제 사람으로 신라에 가서 황룡사 9층탑을 세운 아비지와, 일본에 건너가서 우리 나라의 한학을 전해준 아직기 등이 바로 그 사람이다.

본관과 시조는 분명하지 않으며 전국에 20여 가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安 - 안씨

문헌에는 109본이나 되는데, 광주 안씨, 순흥 안씨 등 6본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기록이 없다.

안씨의 본성은 이씨였는데 신라 애장왕 7년인 806년에 당나라에서 우리 나라로 들어와 개성 송악산 기슭에 정착한 이원의 아들 3형제가 왜구를 무찌른 공을 인정받아 임금으로부터 안씨 성을 받았다.

큰아들 지춘을 방준으로, 둘째 아들 엽춘은 방걸로, 셋째 아들 화춘은 방협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방준은 묵산 안씨로, 방걸은 광주 안씨가 되었으며, 순흥 안씨는 자미를 시조로 삼고 있다.


安 - 광주 안씨

시조는 방걸. 고려 고종 때 광주 사람들이 광주 성주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의병을 모아 이들을 토벌한 공을 인정받아 광주군에 봉해져 광주 안씨의 시조가 되고, 광주가 본관이 되었다.

한편으로 신라 애장왕 때 당 나라로부터 들어온 이원의 아들 삼형제로서, 삼형제가 함께 용감하게 왜구를 무찌르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임금으로부터 직접 안씨 성을 받았다고 전하여진다.


安 - 순흥 안씨

시조는 자미. 고려 시대 보승별장을 지냈고, 순흥에 내려가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순흥을 본관으로 삼았다.

자미 이후의 기록이 없어 자미의 큰 아들 영유의 후손을 제1파, 둘째 아들 영인의 후손을 제2파, 셋째 아들 영화의 후손을 제3파로 나누어 대를 이었다.


安 - 죽산 안씨

중국 용서 사람인 이원이 신라 애장왕 때인 806년에 우리 나라에 들어와 세 아들 지춘, 엽춘, 화춘과 함께 의적의 난을 평정한 공로를 인정받아 안씨 성을 임금으로부터 받았다.

지춘은 죽산 안씨, 엽춘은 광주 안씨, 화춘은 죽성 안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로부터 55대손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한쪽으로는 둘째 아들인 엽춘의 17대손인 원형을 1세로 하고 본관을 죽산으로 삼은 계파가 있다.


安 - 탐진 안씨

고려시대 검교충주원사를 지내고 탐진군에 봉해진 원린을 시조로 삼고 탐진을 본관으로 정했다.

순흥 안씨 시조인 자미의 7대손 3형제 원숭, 원형, 원린 가운데 원숭은 순흥 안씨를 이었고, 원형은 신죽산 안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원린은 탐진 안씨의 시조가 되었다.


安 - 태원 안씨

시조는 만세. 원 나라 태원 사람으로 노국 공주가 우리 나라에 올 때 수행원으로 따라왔다가 정착하여 고려 공민왕 때 예부상서를 지냈다. 후손들이 만세의 고향 태원을 본관으로 삼았다.


夜 - 원평 야씨

시조는 선조. 기록에 보면 석잔, 봉성, 개성, 원평 야씨가 있으나 석잔, 봉성, 개성 야씨의 시조는 분명하지 않다.

원평 야씨의 시조인 야선조는 고려 충렬왕 때 하정사로 원나라를 다녀왔고, 좌부승지를 지냈다.


梁 - 양씨

탐라국 삼성씨의 하나인 양을라를 시조로 하고 있다. 시조 양을라는 먼 옛날, 한라산의 모홍혈(삼성혈이라고도 함)이 터지면서 그 곳에서 솟아올라 모라천에서 인간으로 변했다는 전설의 신이다.

그가 신으로 솟아올라 사람이 되었다는 시기는 역사가 기록된 유사시대 이전이므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벽랑 왕국의 임금이 서해 가운데서 신인이 나타나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예측하며 공주를 보냈는데, 양을라가 이 공주를 아내로 삼고 탐라국을 세우니, 양을라는 임금이 되고 공주는 왕비가 되었다.

그로부터 그 후손들이 900대에 이르며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탐라국의 귀족인 양탕이 광순사의 벼슬로 신라에 들어가니, 신라 국왕이 예절을 갖추어 국빈 대우를 하고 성주 왕자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렇게 하여 왕탕은 신라에서 벼슬을 지냈다.

그 때 양(良)은 양(梁)으로 기록한 것이 양씨로 된 연유로 여겨지고 있다. 그 뒤 양탕의 후손 순이 제주도, 우경이 남원으로 내려가 본관을 다시 정해 2계파로 나뉘었다.


梁 - 남원 양씨

시조는 양을라의 후손 양우경. 양탕의 후손으로 신라 경덕왕 때 큰 공을 세워 남원백이 되면서 남원을 본관으로 삼고 남원 양씨의 시조가 되었다.

남원 양씨는 양능량, 양능길, 양성준, 양수정, 양주윤, 양윤위 등을 각각 중심으로 하는 계파로 갈라졌다.


梁 - 제주 양씨

중시조 양순은 신라 신문왕 때인 682년에 한림학사로 신라에서 벼슬을 지냈으나 탐라국 사람이라 하여 벼슬이 더 이상 올라가지 않자, 탐라군으로 제주도에 와서 본관을 삼았다.

그 뒤 장군파, 사직공파, 장공파, 봉관파, 천호공파 등 5개 파로 나뉘었다.


楊 - 양씨

기록에는 47본으로 되어 있으나 남원, 밀양 등 6본을 제외하고는 기록이 소상하지 못하다.

양씨는 중국 원 나라에서 도첨의시중을 지내다가 고려 공민왕 때인 1352년 노국 공주를 수행하여 우리 나라에 온 양기가 청주백에 봉해지면서 시작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고려 고종 때 정승으 지내고 중화백이 된 양포를 시조로 하는 계파가 있다.

기록에는 양포의 큰아들 동요가 김방경 장군 부하로 진도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한다면 노국 공주를 따라온 양기의 1352년보다 82년이나 앞서는 1270년이 되어 양씨는 중화 양씨가 청주 양씨보다 먼저라는 이야기도 있다.


楊 - 남원 양씨

시조는 경문. 고려 때 지영월군사로 있었다는 기록 외에는 다른 기록이 없다.

후손들이 남원에 계속 살았으므로, 남원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楊 - 밀양 양씨

시조는 양근. 청주 양씨의 시조인 양기의 후손으로, 고려 말기에 밀양군 벼슬을 하여 밀양이 본관이 되었다.


楊 - 안악 양씨

시조는 만수. 고려 때 전서를 지내고 많은 공을 쌓아 안악군에 봉해지자 그 때부터 그의 후손들이 안악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楊 - 중화 양씨

시조는 양포. 고려 고종 때 정승을 지냈으며 중화군에 봉해져 그 후손들이 중화를 본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 중국 원 나라의 도첨의 정승으로 고려 충선왕 때 제국 공주를 모시고 우리 나라에 온 양기의 제 6대손 양포가 중화 양씨의 시조라는 이야기도 있다.


楊 - 청주 양씨

양씨는 원래 중국 성씨로, 당숙주의 후손 백교가 진 나라에서 주 나라로 건너가 양후에 봉해진 후부터 양씨가 되었다고 한다.

청주 양씨의 시조인 양기는 그의 후손. 고려 공민왕 때 우리 나라에 와 벼슬을 지내다가 다시 원 나라로 돌아가 사신으로 공을 세웠다.

그 후에 청주 관적을 하사받게 되자 그 때부터 청주 양씨의 시조가 되었다.


楊 - 통주 양씨

시조는 복길. 이 사람도 중구 통주 사람이다. 명 나라 9의사의 한 사람으로 나라가 망하자 소현세자를 따라 북쪽 경계선遁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고 우리 나라에 귀화하였다.

후손들이 그의 고향 통주를 본관으로 정하였다.


魚 - 어씨

문헌에 보면 19본이 있으나 충주, 함종 어씨를 제외하고는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

충주 어씨는 본래 지씨였으나 시조 어중익의 겨드랑 밑에 비늘이 있다고 하여 임금이 이를 어씨로 고쳐주었다고 한다.

함종 어씨는 원래 중국인으로 남송 때 난을 피하여 우리 나라로 들어온 화민을 시조로 한 성씨이다.


魚 - 청주 어씨

시조는 중익. 본래는 지씨였으나 고려 태조가 그의 겨드랑 밑에 붙어 있는 비늘을 보고 깜짝 놀라, "그대 몸에 인감이 있으니 이는 물고기가 아닌가?" 하며 어씨로 고쳐주었다고 한다.

그 뒤 기록이 없다가 성균 진사를 지낸 숭진의 증손 유소가 좌대장으로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충주군에 봉해져 숭진을 1세로 하고 충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魚 - 함종 어씨

시조는 화인. 고려 명종 때 인장동정 벼슬을 지내고 강를에 살다가 함종으로 이사하여 함종이 본관이 되었다.
화인은 본래 중국 사람으로, 남송 때 난리가 일어나자 우리 나라에 피신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嚴 - 영월 엄씨

시조는 임의. 당 나라 사람으로 신시랑과 함께 파락사라는 사신 임무를 맡고 신라로 들어와 그대로 머물러 살았다.

임의가 고려 시대 호부원의랑 벼슬을 지내고, 큰아들 태인이 군기감을 지낸 뒤, 영월군에 봉해져 영월이 본관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엄씨와 신씨가 모두 영월을 본관으로 삼고 있으므로 성씨는 달라도 한 본이라 종씨라고 여기면서 혼인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엄임의와 신시랑이 함께 우리 나라에 왔다는 시기는 서로 다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呂 - 성주 여씨

본래 중국 성씨로, 주 나라 무왕이 강태공망을 여에 봉하고 호를 여상이라고 한 것이 여씨의 시초가 되었다.

그의 후손인 여불위와 아들 영이 중국을 통일하여 진시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그의 후손 어매가 황소의 난을 만나 신라 헌강왕 때인 877년 신라로 피신하여 전서를 지내고 성주에 머물러 살아 여씨의 기원을 이루었다.

그의 후손에 임청, 광유 형제가 있었고, 임청의 아들로 양유, 자열, 자장, 자혁의 네 형제가 있었는데 양유, 자열 계통은 성주로, 자장, 자혁 계통은 함양으로 내려가 본관을 삼아 성주 여씨와 함양 여씨로 갈라졌다고 한다.


余 - 의령 여씨

시조는 선재. 중국 송 나라 때 사람으로 간의대부를 지내다가 고려로 귀환하여 의령 땅을 하사받아 정착했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의령을 본관으로 삼았다.


汝 - 여씨

시조나 본관은 분명하지 않아도, 전국에 2가구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延 - 곡산 연씨

시조는 계령. 중국 홍능 사람으로 고려 때 귀화하여 신호위 상장군 벼슬을 지냈다.

그의 7대손 수창이 고려 때 사신으로 왔다가 곡산에 살면서 여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11대손인 연주가 고려 말기에 벼슬을 하다가 조선이 건국되지 곡산에 내려간 뒤, 조선에서 벼슬을 주어도 응하지 않아 곡산부원군에 봉했다고 한다. 후손들이 곡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連 - 전주 연씨

본래는 중국 성씨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전주와 곡산 두 본이 있다.

전주 연씨의 시조는 고려 태조 때 이등 공신인 연주이며, 곡산 연씨는 시조가 분명하지 않다.


燕 -연씨

문헌에는 나와 있으나 중국 성씨로만 알려져 있을 뿐 시조나 본관이 분명하지 않다.

백제 시대 8대 성씨의 하나였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에 보면 성왕 때의 병조판서 연실 등이 있다.

연씨 성은 지금 북한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廉 - 파주 염씨

염씨는 중국 황제의 후손으로 성씨가 여러 차례 바뀐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처음에는 공손씨였으나 희씨, 대염씨, 왕보씨가 되었다가 그의 후손들이 중국 하동에 옮겨 살면서 염씨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뒤 삼한 공신으로 대사도 벼슬을 지낸 교명이 후당 때 난리르 만나 신라로 피신, 우리 나라에 머물면서 염씨의 시조가 되었다.

처음 본관은 봉성이었으나, 중시조인 제신이 곡성부원군이 되어 곡성을 본관으로 바꾸었는데, 연산군 때인 1504년에 곡성이 파주로 이름이 바뀌면서 본관도 파주가 된 것이다.

파주 염씨 이외에도 담양, 용담, 개성, 순창 등 70여본이 있으나 모두 파주 염씨의 후손들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파주 염씨 단본으로 내려온다.


芮 - 부계 예씨

시조는 악전. 고려 인종 때 문하찬성사로 부계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부계로 삼았다.

문헌에는 본관이 의홍으로 되어 있으나, 족보에는 본관이 부계이다. 부계는 의홍의 옛날 이름이다.


吳 - 오씨

오씨는 문헌에 164본 또는 210본이라고 나타나 있으나 나주, 보성, 해주 오씨 등 16본을 제외하고는 그 기록이 졍확하지 못하다.

오씨의 원시조는 신라 22대 지증왕 때 중국으로부터 우리 나라에 건너온 오첨이며, 그의 후손 오연총이 중시조라고 한다.

오첨은 신라 지증왕 때 신라에 와서 살다가 두 아들 가운데 둘째인 오웅을 함양에 남겨두고 나머지 가족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오웅의 12대손 오광우가 다시 중국에 들어갔는데, 그의 손자 오연총이 고려 문종 30년에 다시 우리 나라로 들어와 정착, 중시조가 된 것이다.

오연총의 6대손인 수전이 아들 셋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해주 오시, 둘째 아들은 동복 오씨, 막내 아들은 보성 오씨의 시조가 되었다.


吳 - 고창 오씨

오첨의 17대손 학인이 중시조로 1035년 문과에 급제한 뒤 압록강에서 오랑캐를 토벌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게 되자 고창백이 되어 그 때부터 본관을 고창으로 삼았다.


吳 - 군위 오씨

오첨의 24대손 오숙귀가 고려 시대 벼슬을 하여 비안군을 지내고, 그의 6대손 인철이 고려 때 사복 벼슬을 지낸 뒤 군위에서 살아 후손들이 군위를 본관으로 삼았다.


吳 - 나주 오시

신라 지증왕 때인 500년에 오첨의 24대손 현보의 아들 5형제 중에 막내인 숙규가 나주에 정착하여 나주 오씨가 되었다.


吳 - 낙만 오씨

오첨의 32대 손 오사용이 시조이다. 그는 고려 때 북쪽 국경을 자주 침략하는 오랑캐와 남해안을 노략질하는 왜구들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낙만군에 봉해졌다.


吳 - 동복 오씨

고려 고종 때 공을 세워 동복군에 봉해진 오현좌를 시조로, 동복을 본관으로 정해 37대손까지 이르렀다.


吳 - 보성 오씨

먼 옛날 중국 양자강 부근에 오왕부차가 있었는데, 그의 손자 유양이 천자로부터 오씨 성을 받았으며, 뒤에 오나라 임금이 되었다.

유왕의 46대손이며 오첨의 24대손인 현필이 보성군에 봉해져 보성 오씨의 시조가 되어, 보성이 본관이 된 것이다.


吳 - 울산 오씨

시조는 오성지. 오첨의 24대손 때 해주, 동복, 보성 오씨로 갈라졌고, 해주 오씨의 시조인 현보의 8대손인 연지가 고려 말기에 평장사로 울산을 맡아 울산 오씨의 시조가 되고 울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吳 - 해주 오씨

시조는 오현보. 연총의 세 아들 중 큰 아들로 계단을 토벌한 공로로 임금으로부터 해주군에 봉해져 해주 오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 밖에도 연일 오씨, 장흥 오씨, 전주 오씨, 평해 오씨, 함양 오시, 함평 오시, 화순 오씨, 흥양 오씨가 있다.


玉 - 의령 옥씨

시조는 옥진서. 고려의 요청으로 당 나라에서 파견된 8재사 중의 한 사람이다.

국학의 교수가 된 뒤, 의령군에 봉해져 의령 옥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뒤 기록이 없어 참정 벼슬을 지낸 온종을 1세로 삼았다.


溫 - 봉성 온씨

시조는 온달. 당 나라 때 진 나라를 통합한 숙우의 12대손 소후가 동생 수를 온에 봉하니 국호를 온이라 하고 서울을 평원에 정하였다.

그 뒤 온 나라의 공자장이 나라 이름을 따서 성씨를 온씨로 정하였으나, 자세한 기록이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고구려 평창왕 때 온달이 평강 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고 그로부터 온씨 혈통이 이어졌다.

후손 중에 고려 충목왕 때 회양부사를 지낸 선과 신 형제가 봉성으로 내려가 자리를 잡아 후손들이 그를 1세로 삼고 봉성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王 씨

문헌에 15본으로 되어 있으나, 고려의 왕족인 개성 왕씨와, 성은 같으나 본이 다른 제남 왕씨로 크게 나뉘어진다. 그 외에는 별로 알려지고 있지 않다.

고려 500년 동안 번영을 누려온 왕씨는 조선에 세워지면서 여러 가지 수난을 당해 비극 속의 왕족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본래 개성 왕씨들이 성을 숨기고 다른 성씨로 바꾸어 살다가 몇 대가 지나 다시 왕씨로 찾은 사람도 있으나 그렇게 쉽지 않았다. 그 때 왕씨를 찾지 못한 성씨들은 다른 성씨로 뿌리를 내렸다.


王 - 개성 왕씨

중국 황제 현원의 17대손 조명은 유누와 함께 우리 나라로 와서 정착하였다.

그 뒤 조명의 후손 수곡은 기자가 왕국의 왕이 되었을 때 그의 스승이 되었으며, 기자로부터 왕씨 성을 받았다.

그 뒤 45대손인 염의 13대손 몽 때에 이르렀으나 일토초가 위왕의 후손이라는 소문에 휘말려 지리산으로 숨었다.

지리산에서 몽의 세 아들은 수도사의 가르침을 따라 전씨, 신씨, 차씨로 성씨를 바꾸었다.

차씨의 셋째 아들이 왕씨인데, 그의 후손이 고려를 세운 왕건이다.

이로부터 왕씨 일가는 고려의 왕족이 되면서 500년 동안 영화와 번영을 누렸다.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운 뒤, 왕시를 박해하기 시작하더니, 살아남기 위해 玉씨, 琴씨, 馬씨, 田씨, 金씨 등 왕(王)자를 고칠 수 있는 성씨로 바꾸었다.


王 - 제남 왕씨

시조는 이문. 중국에서는 왕후 장상과 문장 호걸을 많이 내 가문 좋은 성씨로 불린다.

그 뒤, 후손들이 번창하자, 청 나라 태조가 왕시르 없애고자 왕봉강을 심양 포로소로 보내고 압박하자 이문이 봉림대군(뒤에 효종)을 따라 우리 나라로 피신, 벼슬을 지내다가 제남 왕씨의 시조가 되었다.


龍 - 홍천 용씨

시조는 득의. 고려 희종 때인 1208년 시어사를 지내고, 그 뒤 문하시중과 통어사 등 벼슬을 지냈고 홍천으로 내려가 용씨의 시조가 되었다.


愚 - 단양 우씨

시조는 알려지지 않고, 중국 하 나라 우왕의 후예인 우예가 우리 나라에 와 처음으로 단양에 정착하여 단양 우씨가 되었다.

그의 10대손 현보가 공양왕 때 삼사사 벼슬을 하여 단양 부원군이 된 후에 후손들이 단양을 본관으로 삼았다.


元 - 원주 원씨

시조는 응암. 본래 중국 주 나라 성왕의 본성은 희씨였으나 원씨로 고쳤다.

그 뒤 당 나라 8학사의 한 사람인 원경이 우리 나라로 파견되어 원씨의 시초가 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 나라 원씨는 본관이 원주 하나로 되어 있으나, 응암 원곡계, 원성백계, 시중공계, 충숙공계의 4파로 갈라져 있다.

지금 그 후손은 56대에 이르고 있다.


韋 - 강화 위씨

시조는 수여. 중국 팽씨의 후예로서 당 나라 때 세력을 떨쳤던 성씨이다.

수여는 고려 광종 때인 960년 우리 나라에 와서 문하시랑평장사 등 벼슬을 지내고 강화로 내려가 강화 위씨의 시조가 되었다.


魏 - 장흥 위씨

시조는 경. 당 나라 출신으로 신라 선덕여왕 때 파견되어 아량상서시중 벼슬을 지내고 장흥으로 가서 장흥 위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러나 그 뒤 기록이 없어 신라 말기의 대각관시중을 지낸 창주를 중시조로 하여 대를 이어온다.


兪 - 유씨

문헌에 97본으로 되어 있으나 기계 유씨, 인동 유씨, 무안 유씨, 창원 유씨가 번성했고 나머니즌 자세한 기록이 없다.

유씨는 모두 신라 때 벼슬을 지낸 유상재를 원조로 하는 같은 혈족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응부 장군을 비롯해 조선 시대 충신들을 배출하였다.


兪 - 기계 유씨

시조는 삼재. 신라 때 아손을 지냈으며, 그 뒤 신라를 무너뜨린 고려에 반대하므로 고려 태조가 기계 호장으로 보내 그곳에서 살았다.

후손들이 기계를 본관으로 삼고 대를 이어 지금 37대손에 이르렀다.


兪 - 무안 유씨

시조는 순직. 고려 예종 때 공을 세우고 장사군에 봉해졌다.

그의 증손자 천우는 원종 때 최의를 내쫓는데 공을 세웠으나 삼별초의 난 때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큰 인물임이 인정되어 벼슬을 지냈고, 충렬왕 때는 한성사로 승진되었다. 그가 죽자 무안부원군으로 삼으니, 무안이 본관이 되었다.


兪 - 인동 유씨

시조는 승단. 고려 고종 15년인 1228년 추밀원부사가 된 뒤, 참지정사, 집현전 대학사, 수국사 판례부사 등 높은 벼슬을 지내고 인동백에 봉해졌다.

임금의 스승이었던 승단은 글이 뛰어나 원순문이라고 일컬어졌으며, 고종의 강화 천도를 혼자 반대하였다.

그 뒤 기록이 끊겨 예부시랑을 지낸 승석을 1세로 삼았다.

조선 시대 성종 때 후손 유진이 통정대부에 올라 홍문관 부제학과 춘추관 수찬관을 지내며 문중을 일으켜 지금 30대에 이르고 있다.


兪 - 창원 유씨

시조는 섭. 고려 시대 정순대부, 보문각직제학을 지냈으며 창원에 정착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창원을 본관으로 삼았다.

기계, 인동 유씨와 함께 원조는 신라 때 유삼재로 보고 있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劉 - 거창 유씨

원래 중국 제모의 후손인 유 땅에 봉해지면서 유씨 성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 뒤 한 나라 고조 때 중국을 통일하고 한제국을 건설하면서 유씨의 공적이 나타났다.

우리 나라 유씨는 한 나라 고조의 41대손인 전이다. 고려 문종 때인 1082년 고려에 들어온 8학사중 한 사람으로 병부상서 등을 지냈다.

유씨는 거창 유씨, 강릉 유씨, 백천 유씨 등이 있으나 모두 전을 시조로 갈라졌다.


庾 - 무송 유씨

시조는 검필. 중국 한 나라 말기와 진 나라 초기에 유순유가 중국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왔다가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머물러 살면서 벼슬을 지냈고, 평산 유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러나 5대손 녹승이 문종, 숙종 때 벼슬하고 정승을 지낸 뒤, 무송부원군에 봉해져 본관을 무송으로 바꾸었다.


陸 - 옥천 육씨

시조는 보. 중국 절강 사람으로 927년 신라 경순왕 때 홍은설, 정간과 함께 당 나라의 선교사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문학을 선교하였다.

경순왕은 육보의 문장이 뛰어남에 감탄, 부마로 삼고 옥천군에 봉해 옥천 육씨의 시조가 되고, 옥천이 본관으로 정해졌다.


尹 - 윤씨

윤씨는 문헌상에 149본으로 나와 있으나 10본을 제외하고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윤씨는 조서 시대 대표적인 가문의 하나로 손꼽힌다. 그 가운데서도 파평 윤씨는 왕비, 학자, 장군 등을 배출하며 세력을 떨쳤다.

해평, 무송, 칠원, 해남 윤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파평 윤씨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보는 주장이 있다.


尹 - 남원 윤씨

시조는 신달의 8대손인 위.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국자 박사, 기거랑, 예빈소경 등 벼슬을 지냈다.

1200년 신종 때 안염사로 호남에 갔다가 남원에서 복기남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남원백에 봉해지자 그 때부터 남원 윤씨의 시조가 되었다.


尹 - 무송 윤씨

본래 소호씨였으나 소호금천의 아들 반이 궁정이 되고 옹주외 윤성에 봉해지자 윤씨로 바뀌었다.

그의 후손 윤경이 난리를 피해 우리 나라로 와서 정착한 곳이 무송이라, 무송을 본관으로 한 무송 윤씨의 시조가 된 것이다.


尹 - 파평 윤씨

시조는 신달.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1107년 여진을 평정한 공로로 공신이 되어 파평현 개국백에 봉해졌다.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으로, 그를 시조로 삼아 40대에 이르렀다.

함안파, 남원파, 덕산군파, 문정공파, 신령파 등 무려 22개 파로 갈라져 있다.


이 밖에도 양주 윤씨, 영천 윤씨, 예천 윤씨, 칠원 윤씨, 함안 윤씨, 해남 윤씨, 해평 윤씨 등이 있다.


殷 - 행주 은씨

시조는 홍열. 신라 때 벼슬을 하여 보문각 대제학에 올랐다.

그의 선조는 당 나라 학사로 우리 나라에 와 행주에 정착하여 행주를 본관으로 한 행주 은씨의 시조가 되었다.


陰 - 죽산 음씨

시조는 음준. 원 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예부시랑을 지냈고 고려 때 노국 공주를 수행한 8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와 벼슬을 지낸 뒤, 죽산군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죽산을 본관으로, 그를 시조로 삼아 지금 31대에 이르고 있다.


李 - 이씨

이씨는 문헌상 546본으로 나타나 있으며 김씨 다음으로 많은 성씨이다.

많은 본과 가운데 100여본을 제외하고는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

이씨는 신라 6부 촌장의 한 사람이 유리왕 때인 32년 이씨 성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고 이씨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하사받은 이씨와 중국에서 건너온 이씨로 크게 나뉜다.

이씨도 유씨처럼 리씨로 표기하는 성씨가 있다. 전주 이씨가 대개 전주 리씨로 쓰고 있다.


李 - 전주 이씨

시조는 이한. 덕망이 높고 문장이 뛰어나 신라 문성왕 때 사공 벼슬을 지냈으며, 그 뒤 후손들이 신라 시대 벼슬자리에 많이 올랐다.

시조 한의 22대손인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임금이 되어 전주 이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그 뒤 이성계의 아들로부터 계파의 1세가 되어 전주 이씨의 500년 왕조가 뿌리를 내렸다.

전주 이씨의 시조 묘소가 전주에 있고 시조로부터 18대손까지 전주에 살았으므로 전주를 본관으로 삼은 것이다.

전주 이씨는 시중공파, 평장사공파, 주보공파 등 무려 102파로 나뉘어져 있다.


李 - 가평 이씨

시조는 춘계. 고려 시대 판도판서 벼슬을 지냈다. 그의 증손자 현손이 조선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마절도사로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가평군에 봉해져 가평을 본관으로 가평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李 - 강진 이씨

시조는 이진. 본래 신라 남해왕 때의 사람 이완이 시조라 하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이진을 중시조로, 강진을 본관으로 삼았다.

이진은 고려 충선왕 때인 1308년 원 나라 사신으로 있을 때 공을 세워 공민왕 때 평리 벼슬을 지냈다. 또한 천추사로 원 나라를 다녀왔다.


李 - 경주 이씨

시조는 알평. 진한 6부 촌장의 한 사람으로 기원전 57년 다른 5부 촌장과 함께 박혁거세를신라 초대 임금으로 받들고, 개국 공신이 되어 아손의 벼슬을 지냈다.

그 뒤 유리왕 때 이씨로 성을 하사받고 경주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시조의 고향이 경주라 본관을 경주로 삼은 것이다.


李 - 광산 이씨

시조는 김정. 본래 김씨로서 김알지의 후손 헌안왕의 7대손인 김정이고려 때 향공 견사 벼슬을 지냈고, 그의 8대손 순백은 고려 충숙왕 때 왕이 토번으로 가게 되자 다른 신하들은 모두 도피했으나 혼자 임금을 수행한 공로로 광산부원군이 되어 이씨 성을 하사받았다.

최근 문헌이 발견되어 경주 김씨 후예임이 분명해지자, 정을 시조로, 순백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李 - 광주 이씨

시조는 이자성. 신라 내물왕 때 벼슬을 지내고, 후손들이 신라에서 계속 벼슬을 하였으나, 신라가 고려에게 나라를 넘겨주자, 이에 반대하고 절개를 지켰다.

그 뒤 후손인 당이 광주 유수의 딸과 결혼하여 다섯 아들을 두었다.

이들이 성장하여 고려에서 모두 벼슬을 하면서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본관은 조상들이 살기 시작한 준안이 고려 성종 때 광주로 바뀌자 광주로 삼았다.


李 - 성주 이씨

시조는 이순유. 동생 돈유와 함께 신라 때 벼슬하여 재상에 올랐으나 신라가 망하자, 절개를 지켜 고려에 협조하지 않고 이름을 국신이라고 고치며 성주에 머물러 살았다.

고려에서는 성주 이씨 가문을 대대로 성주 호장으로 삼으며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 뒤, 고려 고종 때에 이르러 시조의 12대손 장경의 아들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성주 이씨의 가문을 빛냈다.


李 - 수원 이씨

시조는 자송. 공민왕 때인 1358년 양광 전라도 관찰사가 되고, 1362년 전법 판서로 원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홍건적을 평정하여 공을 세웠다.

귀국하여 수원부원군으로 봉해져, 수원을 본관으로, 수원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李 - 연안 이씨

시조는 무. 중국 당 나라 출신으로 중랑장이 된 뒤에 소정바의 부장이 되어 신라에 들어온 뒤, 백제를 평정한 공로로 연안백에 봉해져 연안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손이 10개파로 갈라져 지금 40대에 이르렀다.

이 밖에도 강화 이씨, 개성 이씨, 결성 이씨, 경산 이씨, 고령 이씨, 고부 이씨, 고성 이씨, 공주 이씨, 광평 이씨, 교하 이씨, 김구 이씨, 기장 이씨, 김포 이씨, 나주 이씨, 남평 이씨, 단성 이씨, 단양 이씨, 담양 이씨, 대흥 이씨, 덕산 이씨, 덕수 이씨, 덕은 이씨, 동성 이씨, 벽진 이씨, 봉산 이씨, 부안 이씨, 부여 이씨, 부평 이씨, 상산 이씨, 서림 이씨, 성산 이씨, 수안 이씨, 순천 이씨, 신펑 이씨, 아산 이씨, 양주 이씨, 여주 이씨, 영천 이씨, 영해 이씨, 온양 이씨, 용궁 이씨, 용인 이씨, 우계 이씨, 무봉 이씨, 울산 이씨, 장수 이씨, 장흥 이씨, 재령 이씨, 전의 이씨, 정선 이씨, 정주 이씨, 진보 이씨, 진안 이씨, 진위 이씨, 진주 이씨, 창령 이씨, 청송 이씨, 청안 이씨, 청주 이씨, 청해 이씨, 충주 이씨, 태안 이씨, 태원 이씨, 통진 이씨, 평산 이씨, 평창 이씨, 하빈 이씨, 하음 이씨, 학성 이씨, 한산 이씨, 함안 이씨, 함평 이씨, 합천 이씨, 해남 이씨, 해주 이씨, 홍주 이씨, 화산 이씨, 회덕 이씨, 홍양 이씨 등이 있다.

우리 나라 성시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은 성씨이다.


異 - 밀양 이씨

시조는 알 수 없으나, 중국 당 나라 때 운남왕이 된 이위심이 있었다.

우리 나라에는 밀양 단본으로 되어 있으나, 동성, 청양, 남원의 3본이 있다고도 한다.


印 - 교동 인씨

시조는 인단. 인단의 후손인 서가 진 나라 풍익대부로신라 기임왕 때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와 정착하여 벼슬이 아손이 이르고 교동백이 되었고, 후손 빈이 교동부원군이 되어 교동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뒤의 기록이 없어 고려 때 병마사를 지낸 당을 1세로 하여 계통을 이어오고 있다.


任 - 임씨

문헌에 120본으로 되어 있으나 장흥, 풍천을 제외하고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장흥 임씨와 풍천 임씨 모두 시조는 중국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任 - 장흥 임씨

시조는 임호. 일찍이 중국에서 이부상서를 지냈고,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우리 나라로 망명하여 장흥에 머물면서 장흥 임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손자 원후가 고려 인종 때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고 정안부원군에 봉해지자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장흥으로 하였다.


任 - 풍천 임씨

시조는 임온. 중국 소흥부 사람으로 은자광록대부라는 벼슬을 지냈다.

그의 6대손 주가 고려 충렬왕 때 우리 나라에 들어와 안찰사 벼슬을 하고, 풍천으로 내려가 풍천 임시의 시조가 되었다.

임씨는 문헌에 120본으로 되어 있으나, 장흥 임씨와 풍천 임씨 이외에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林 - 임씨

기록에는 216본으로 되어 있으나 나주, 평택 임씨를 제외한 본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나주 임씨는 고려 대장군 임비를 원조로 하고, 평택 임씨는 임팔급을 원조로 하여 계통을 이어나간다.


林 - 나주 임씨

시조 임비는 고려 때 벼슬하여 충렬왕 대인 1281년 왕을 수행하여 원 나라를 다녀온 뒤, 대장군에 이르렀다.

그의 후손 탁이 해남 감무로 있을 때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자, 이에 따르지 않고 나주로 내려가 나주 임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5개파로 갈라졌다.


林 - 평택 임씨

당 나라에서 건너 온 임팔급은 평택에 머물러 평택 임시의 시조가 되었다.

당 나라 문종 때 한림학사였으나, 간신들에게 밀려 학사 7명과 함께 신라로 건너와 변방을 튼튼히 하는 데 공헌하고 평택으로 가 뿌리를 내렸다.

그 뒤 후손들이 번창하면서 조양, 선산, 진주, 울진, 예천, 부안, 경주 등 20여 파로 갈라졌다.

그러나 평택 임씨가 임씨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