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유래 -史사~沈심 작성일 2004-06-08

史 - 사씨

문헌에는 16본으로 되어 있으나 사요를 중시조로 한 청주 사씨와, 시조가 분명하지 않은 거창 사씨가 알려져 있다.


史 - 거창 사씨

우리 나라에 오래 전부터 살고 있던 토착 성씨로 고려 말기에 명 나라로부터 귀화한 청주 사씨와 구별된다.

옛날 문헌에는 거창 사씨만 있었으나, 시조를 알 수 없어서 청주 사씨와 구별되기도 한다.

원래 사씨는 중국 성으로 주 나라 때 사일이라는 벼슬이 있었는데, 그 벼슬에 있던 사람이 사씨로 성을 삼았다고 전해진다.

역사에 나타난 인물을 보면, 고려 예종 때 이부상서를 지낸 사영, 명종 때 좌복사 참지정사를 지낸 사정유, 고종 때 삼지정사를 지낸 사홍기, 병부상서를 지낸 사광필, 안무사를 지낸 사정기 등이 있다.

이들 사람들이 청주 사씨가 본관을 정하기 이전에 벼슬을 하였으므로 거창 사씨로 짐작이 된다.

이들이 지낸 벼슬도 그 당시로서는 지체가 높은 상당한 벼슬이었다.


史 - 청주 사씨

시조는 사요. 중국 산동성 사람으로 명 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워 개국 공신이 되었다.

예부상서에 오르자 다른 사람들이 모함하여 고려 공민왕 때 우리 나라로 망명하였고, 명 나라 태조의 조서로 파주에 내려가 자리를 잡았다.

후손들이 사씨의 발상지인 중국 산동성의 청주를 그리워하며 본관을 청주로 정하고 대를 이어왔다.

지금 후손은 38대에 이르렀다.

이 밖에도 본관과 시조가 분명하지 않은 사(舍)씨, 사(謝)씨가 있으나, 두 서 모두 합하여 전국에 다섯 가구 뿐이다.


사공(司空) - 효령 사공씨

사공씨는 진 나라 때 가행이라는 사람이 사공이라는 벼슬을 지내고 그 이름을 성으로 받았다는 데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뒤 후손인 사공동가 당나라 애제 임금 때 한림 학사로 예부상서 벼슬에 올랐는데, 신라 효공왕 때 동료 학사 7명과 함께 우리 나라로 귀화하여 시조가 되었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이나 문헌이 없어서 계통을 이어오지 못하다가 그의 후손인 중상이 고려 충숙왕 때 벼슬을 하여 효령군에 오르자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로 삼고 본관을 효령이라고 정하였다.


尙 - 목천 상씨

시조는 국진. 원래 백제 유민으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 이에 따르지 않고 당시 목천현 상왕산(지금 확성산) 아래 모여 살면서 백제를 다시 세우고자 노력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들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미워하여 성을 빼앗았다.

그 뒤 국진의 아들 득유가 문종 14년 때인 1060년에 최충이 설치한 시빙제의 학사가 되었다.

그때야 비로소 본래의 성을 되찾았다.

후손들은 선조들이 살아온 목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지금 38대에 이르고 있다.


徐 - 서씨

문헌에 나타나 있는 서씨는 165본이나 된다. 그러나 11본은 분명하지만, 나머지 서씨는 분명하지 않다.

서씨는 본래 이천 서씨가 원조로 알려져 있고 그 밖의 서씨들은 이천 서씨의 후손인 것으로 짐작이 될 뿐 정확한 기록은 없다.

전설에 따르면 먼 옛날 기자 조선 때 마지막 임금인 기준이 위만에게 쫓기어 지금의 이천 땅 서아성으로 내려와 자리잡고 살기 시작한 것이 서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 나라 성씨 가운데 기자에 근본을 두고 있는 성씨로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 행주 기씨 등이 있다.

서씨의 바탕은 이천 서씨이나,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나온 집안은 대구 서씨이다.

서씨 가운데 삼대 정승과 삼대 대제학을 지낸 집안은 대구 서씨를 비롯하여 청풍 심씨, 청송 김씨가 있을 뿐이며, 그 가운데서 6대에 걸쳐 삼정승 삼대제학을 낸 집안은 대구 서씨 하나 뿐이다.


徐 - 남양 서씨

시조는 중국인 서간. 8학사의 한 사람으로서 정관연간 때(627-647년) 우리 나라에 와서 남양 땅에 정착해 살다가 태서 벼슬을 얻어 남양군에 봉해졌다.

그의 후손 후후가 고려 현종 때 좌정승으로 계단의 침입을 물리친 공으로 남양군에 다시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남양으로 하였다. 지금 42대 손까지 내려왔다.


徐 - 남평 서씨

시조는 호. 신일의 후손으로 남평에 자리를 잡고, 그의 손자인 지는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종 때는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천 서씨에서 갈라져 나와 호와 지둥 선대들이 살던 남평을 본관으로 하여 뿌리를 이루었다. 그러니까 남평 서씨의 큰 집은 이천 서씨집인 셈이 된다.


徐 - 달성 서씨

시조는 진. 고려 봉익대부, 판도판서 등을 지낸 공이 있어 달성군에 봉해졌고, 달성을 다스리도록 임금의 명을 받았다.

그 곳에서 집안의 뿌리를 내리고 자손들이 번창하자, 후손들이 달성을 본관으로 삼고 대를 이어오기 시작하였다.

지금 30대손까지 이르렀다.


徐 - 당성 서씨

시조는 득부. 본래 남양에 토착한 남양 서씨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그러다가 13대손이며 중종 때 유명한 경덕이 벼슬을 하자, 후손들이 득부를 중시조로 하고 당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徐 - 대구 서씨

시조는 한. 고려 시대 때 조봉대부군기소윤을 지냈으며, 그 뒤 6대까지는 기록이 없어 계통을 알 수 없다.

후손으로 서거정 등 많은 인물이 나와 명문 씨족의 하나로 꼽히자, 선조들이 뿌리를 내리고 벼슬을 한 대구를 본관으로 삼았다. 지금 42대까지 번창하고 있다.


徐 - 부여 서씨

시조는 여륭. 백제 의자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여륭은 본래 성이 부여씨였다고 한다.

백제가 망하자 당 나라로 망명하였는데, 당 나라 고종이 여(餘)자를 서(徐)자로 고쳐 농진도층 벼슬을 주었다.

그 뒤 다시 우리 나라로 돌아와 살았다고 하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1세조 신밀의 6대손인 존은 고려에서 병부상서를 지냈고 태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본래의 성인 부여를 본관으로 삼고 대를 이어 지금 43대에 이르렀다.


徐 - 연산 서씨

시조는 준영. 신일의 후손으로 여러 대를 이어 오면서 연산에서 뿌리를 내렸다.

준영의 아들 서보가 있었으나 기록이 없자 후손들이 의민을 1세조로 삼아 이천 서씨에게 갈라져 나와 연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徐 - 이천 서씨

시조는 기준. 기자의 42대손인 기준이 이천 서하성에 머물면서 그 후손이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전설에는 여수기가 예 나라 추장으로 아홉 아들으 fendjTsmsep, rm 아들들이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고 한다.

아들들이 백성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여 백성들이 나와 너를 하나로 묶는다며 서(徐)자 성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또 어떤 전설에는 백제 의자왕의 아들 여륭이 전쟁에서 지고 당 나라로 망명하였을 때 당 나라에서 여륭의 여(餘)자를 서(徐)자로 고쳐주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기준의 후손인 신일은 신라 효공왕 때 벼슬을 지내다가 나라의 운명이 쇠퇴하였음을 깨닫고 의천 효양산 기슭에 복성당을 짓고 들어가 세상 출입을 하지 않으면서 지내, 처사라는 별명이 붙은 채 일생을 마쳤다.

그리하여 시조가 머물러 살던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가장 신빙성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의 묘소는 이천 효양산에 있으며 해마다 10월 1일 제사를 모신다.


徐 - 장성 서씨

이천 서씨의 시조 신일의 11대손인 서릉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서릉은 고려 고종 때 시중 벼슬을 지내고 장성으로 내려가 장성 땅을 다스렸다.

그래서 후손들이 이천 서씨에서 본관을 장성으로 고치고 대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徐 - 절강 서씨

시조는 해룡. 중국 절강성 사람인 해룡은 중손 학이 도총관으로 선조 30년인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우리 나라에 와서 난을 평정하고 공을 세운 뒤 성주 대동방에 정착하였다.

후손들이 시조의 고향을 그리며 중국 절강 땅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徐 - 평당 서씨

시조는 준방. 신일의 후소으로 고려 때 형부상서로 있으면서 나라에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 큰 공을 세워 평당군에 봉하여 졌다.

그 때부터 후손들이 평당을 본관으로 삼았다.


石, 昔 - 석씨

석씨는 石씨, 昔시, 碩씨의 세 가지 성씨가 있다.

石씨는 문헌에 85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충주(또는 홍주) 석씨, 해주 석씨가 알려져 있으며, 昔씨는 월성 석씨 단본이 있고, 碩씨는 단 1가구 뿐인 것으로 나타났다.


石 - 충주 석씨

시조는 석린. 고려 의종 때 랑장으로 있던 두경승과 함께 조위 총관을 평정한 공으로 삼장군이 되었고, 이어 서북병마사를 지냈다.

그 뒤 충주군에 봉해져 충주가 본관이 되었다.

그의 7대손 천을에 이르러 아들 둘이 있었는데 큰 아들 수명은 본관을 홍주라 하고 중시조가 되었으며, 작은 아들 여명은 본관을 충주라 하여 중시조가 되었다.

그러다가 후손들이 다시 충주 석씨로 본관을 통일하여 지금 31대에 이르렀다.


石 - 해주 석씨

시조는 석성. 중국 동명 사람으로 1559년에 진사 이과에 급제하고 명 나라 목종의 잘모승? 아뢰다가 벼슬에 쫓겨났으나 다시 등용되어 병무상서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우리 나라를 돕는데 공이 컸으나, 심유경으로 인하여 감옥에 들어가는 운명이 되었다.

감옥에서 나와 다시 벼슬을 한 뒤 아들 담이 우리 나라에 와 해주에서 살면서 수양군에 봉해져 땅을 하사받고 본관을 해주로 삼았다.


昔 - 월성 석씨

시조는 석재흥. 신라 4대 임금인 석탈해니사금의 23대손이다.

석씨는 신라 56명의 임금 가운데 8명이 왕으로 즉위하였으니, 그 왕은 곧 석탈해, 벌휴황, 나해왕, 조세왕, 첨해왕, 유례왕, 기임왕, 흘해왕이다.

재홍은 고려 시대 시랑 벼슬을 지냈으며, 후손들이 재홍을 중시조로 하고, 경주의 옛 이름인 월성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碩 - 선씨

시조나 본관은 분명하지 않으나, 1960년 국세 조사 통계에 단 1명이 경기도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宣 - 보성 선씨

시조는 선윤지. 중국 노 나라 대부 선백의 후예로 명 나라 때 문연각 학사로서 1382년 고려 우왕 때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하여 안염사가 되었다.

그 당시 해안 지방에 침입하여 백성들을 괴롭히는 오랑캐들을 내쫓고 민심을 바로 잡아 안정시켰으며, 유교의 양성과 인재 교육에도 힘썼다.

그 뒤 조선이 건국되었으나 고려에 대한 충성심과 의지를 지켜 보성에 눌러 앉아 인재를 양성하는데만 전념하였다.

그 후손들이 보성을 본관으로 하여 대를 이어오기 시작, 지금 30대에 이르렀다.

고려 말기 예의판서, 우문각, 대제학 등을 지냈고 조선이 건국되자 보성 백이산으로 내려온 선원지를 시조로 하는 계통도 있었으나, 같은 혈손이라 하나로 합쳤다.


先 - 선씨

시조나 본관은 알 수 없는 성씨인데, 전국에 2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鮮于 - 태원 선우씨

우리 나라 선우씨의 내력은 기자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자가 기자 조선을 세우고 그의 큰아들손이 2o 장혜왕으로 즉위하면서 동생인 증을 우산국에 봉하여 나라를 세우게 하였으므로 조선과 우산국에 있는 자손들을 이어주고자 조선의 선자와 우산국의 우자를 하나씩 따서 선우라는 성씨를 만들고 본관을 태원이라고 정하였다.

그 뒤 41대 왕인 애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피신하여 금산 땅에서 마한을 세웠는데, 이 나라도 10대 계왕에 이르러 백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 때 원왕에게 아들 3형제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양이 용강 오석산으로 들어가 황용국을 세우고 왕이 되어 선우씨의 계통을 이어갔다.

그리고 아들 한 명은 청주 한씨, 다른 아들은 행주 기씨가 되었다.

그 뒤 양의 10대손 병에 이르러 나라를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서민으로 태원 선우씨의 계통을 이어왔으나 문헌이나 기록이 없어 계통을 밝히지 못하고, 고려 문종 때 중서주서를 지낸 정을 1세로하여 계통이 내려오고 있다.


薛(人 + 契) - 설씨

설씨는 薛씨가 문헌에 23본이 나타나 있으나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 2본 이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설(人 + 契)씨는 경주 설씨 단본으로 되어 있다.


薛 - 경주 설씨

순창 설씨와 같다. 시조 지덕의 후손으로 습비부가 경주에 속하므로 본관을 경주로 하였다가 자승이 순화백에 봉해져 본관을 순창으로 하였으나, 종전대로 경주를 본관으로 이어가고 있다.


薛 - 순창 설씨

설씨의 시작은 신라가 세워지기 이전인 기원전 57년 6부 촌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6부 촌장의 한 사람인 명활산 고야 촌장 호진이 다른 5부 촌장과 함께 박혁거세를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하여 개국 공신이 되었다.

그 뒤 유리왕 9년에 왕이 6촌을 부로 바꾸면서부터 촌장들에게 성을 내리게 되는데 고야촌 촌장에게는 설씨 성을 주었다.

그러다가 36대손 자승이 고려 인종 때 예부시랑으로 순창백에 봉해져 자승이 중시조가 되어 순창 설씨가 생겨났다.

그러나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계통이 설씨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


薛(人 + 契) - 경주 설씨

시조는 손. 경주 설씨의 선조는 회골 사람으로 설연 땅에 살면서 성씨를 설씨라고 하였다.

그 뒤 원 나라에 들어가 귀화하여 대대로 벼슬을 지낸 가문으로 태전 극직의 8대손이 경주 설씨의 시조 손이다.

손은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난 시인으로서 공민왕 7년 때인 1358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망명하자, 그를 부원후에 봉하고 부원 땅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의 아들 장수가 경주로 옮겨가 후손들이 경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成 - 창녕 성씨

시조는 인보. 중국 성씨로서 주나라 문왕의 일곱째 아들 성숙부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 자손이 나라 이름을 그대로 성씨로 삼았다.

그 뒤 당 나라 때 학사 경이가 우리 나라로 건너왔으며, 뒤에 백제에는 충이, 신라에는 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인품이 뛰어나고 벼슬이 당당하여 임금님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창녕 성씨의 시조 인보는 신라 대관저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시조 인보는 창녕에서 뿌리를 내리고 그 후손들이 세력을 얻어 호장을 지냈다.

고려 태조는 사람을 보내 창녕 지방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인보의 후예들이 호장이 되어 다스렸다.


蘇 - 진주 소씨

시조는 소벌. 중시조는 경이다. 진주 소씨의 전설은 요 나라 임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요임금은 구이중의 하나인 풍이의 후손으로, 그의 선대 할아버지인 기곤오를 소성의 하백으로 임명하였다.

기원전 2266년 소성은 단군 조선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때 기성을 소성이라 하면서 기곤오가 소곤오로 바뀌고 소씨가 생겼다.

어느 날 경이 꾸었던 꿈대로 진주 도사곡으로 이사해 아홉 아들을 두었는데, 아들들이 모두 큰 벼슬을 하였다. 후손들은 소벌을 시조로 하고, 진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자손들이 번창하여 오늘날에는 68대까지 내려오고 있다.


蘇 - 평산 소씨

시조는 소웅. 주 나라 소공의 후손이라고 한다. 연추관으로 신안백에 봉해졌다.

그 후손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 큰 활약을 하였는데, 두드러진 인물로는 경상도 안찰사를지낸 광빈을 비롯해 문종 때부터 숙종 때에 이르는 동안 문하시중, 수태사 등을 지낸 태조가 있다.


孫 - 손씨

손씨는 문헌에 118본이나 된다. 그러나 밀양, 비안, 안동, 월성, 청주 등 7본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기록이 없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가 국가로 성립되기 전의 원시 부족국가 사회인 사로(서라벌)에는 6촌이 있었고, 6촌에는 촌장이 있었다.

그 촌장들은 각각 손, 이, 최, 정, 배, 설씨라는 성을 받았다.

이 때가 신라 제3대 임금인 유리왕 9년이었다. 여기서 손씨가 생겨난 것이며 손씨 성을 받은 촌장은 무산 대수촌의 촌장인 구례마였다.


孫 - 경주 손씨

시조 구례마의 후손으로 중시조 순을 모시는 손씨 계파이다.

순은 효성이 지극하여 흥덕왕 때인 853년에 경주의 옛 이름인 월성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경주라 하였으나, 뒤의 후손 기록이 없어 이어오지 못하다가 경원을 1세로 하여 계통을 이어왔다.


孫 - 밀양 손씨

구례마의 후손 손순의 큰손자인 익감이 신라에 공헌하고 흥덕왕 때 밀양군에 임명되면서 본관이 밀양으로 되었다.

익감은 익담과 익원 등 두 동생이 있었는데 3형제가 모두 효성이 지극해 칭찬을 받았다.

밀양 손씨는 진사공파, 명천공파, 청파공파, 오곡공파, 봉호공파, 팔용파 등으로 나뉘어졌으며, 그 후손들이 모두 50대 이상으로 번창하고 있다.


孫 - 비안 손씨

중시조는 을구. 자세한 기록은 없다. 문과에 급제하고 절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 뒤 계통이 이어지지 않고 있다가 조선 초기 도총제사를 지내고 비안으로 내려간 연을 1세로 하고 본관을 비안으로 정하였다.


孫 - 안동 손씨

중시조는 손웅. 본래 성이 순이었으나, 고려 현종 임금의 이름이 순이어서 발음이 같다하여 손씨 성을 임금으로부터 받았다.

중간 기록이 없어 끊어지다가 8대손인 원유가 안동군에 봉해지면서 본관을 안동으로 바꾸었다.


孫 - 월성 손씨

월성 손씨는 신라 6부 촌장의 한 사람인 무산 대수촌장에 구례마가 신라 개국 공신이 되면서 임금으로부터 손씨 성을 하사받은 것이 그 시초이다.

그 뒤 후손 순이 효행으로 흥덕왕 10년인 835년에 월성군에 봉해졌고 그의 손자 익원이 또 월성군에 봉해지면서 순을 중시조로, 월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孫 - 청주 손씨

시조는 필영. 신라 6부 촌장인 구례마의 후손이다.

고려 때 개성군에 봉해졌다가 청주군으로 옮겼다. 후손?이 그를 시조로 섬기고 본관을 청주로 삼아 계통을 이어가고 있다.


孫 - 평해 손씨

시조는 역시 월성. 밀양 손씨와 같다. 손자 익담이 평해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평해로 삼아 계통을 이어가고 있다. 그로부터 자손들이 번창하여 지금 45대손으로 이어졌다.


宋 - 송씨

송씨는 문헌에 172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15본을 제외하고는 그 기록이 거의 없다.

우리 나라의 모든 송씨는 중국 경조 충신으로 당 나라에서 호부상서를 지낸 송주은의 후손들이다.

우리 나라에 귀화한 내력은 분명하지 않다. 송주은의 7대손인 손순공의 후손 자연이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유익은 여산 송씨로, 둘째 아들 천익은 은진 송씨로, 셋째 아들 문익은 서산 송씨가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자손이 번창하면서 이 3본에서 점차 갈라져 나갔다.


宋 - 김해 송씨

중시조는 천봉. 시호는 문정공. 고려 충렬왕 때인 1330년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장병, 광양 군수, 대사헌 등의 벼슬을 지냈다.

김해군에 봉해져 김해 송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러나 후손의 기록이 없어 중간이 끊어졌으므로, 후손인 길정을 1세로 하여 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宋 - 남양 송씨

시조 공절은 고려 말기에 진사를 지내고 문하시랑이 되었고, 그의 아들 침은 문과에 급제한 후 감사를 거쳐 온청광록대부문하시중에 이르러 남양군에 봉해져 본관이 남양으로 되었다.


宋 - 덕산 송씨

시조 곤산은 고려 시대 찬성사를 지내고, 그의 손자 문이 호조판서를 지내며 공을 세워 덕산군에 봉해져 본관이 덕산으로 되었다.


宋 - 문경 송씨

시조 신경은 고려 때 선덕랑으로 조정에 들어가 공부, 아부의 전서가 된 뒤, 고려 말기 정국의 문란함을 수습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문경으로 내려갔다.

후손들이 문경을 본관으로 삼았다.


宋 - 신평 송씨

여산 송씨에서 갈려나갔다. 여산 송씨의 12대손인 알선이 신평에서 살았기 때문에 신평 송씨로 된 것 같으나 자세한 기록이 없어 확실한 것은 밝히지 못하고 있다.


宋 - 여산 송씨

시조 유익은 고려 시대 진사로 은청광록대부, 추밀원 부사 등을 지냈다.

그이 4대손인 송례가 중시조로 되어 계통을 이어오며 지금 29대손까지 내려왔다.


宋 - 연안 송씨

시조는 송경. 시호는 숙의. 고려 공민왕 때 찬성사가 되고, 1359년 홍건적 모지경을 토벌한 공로로 지밀직사에 올랐으며, 연안 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연안을 본관으로 삼아 32대에 이르렀다.

한편으로는 신라 박혁거세 때에 전고관을 지낸 지겸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뒤 고려 태조때 개국원훈으로 소부소감을 지냈으며, 연안군에 봉해진 위를 시조로, 연안을 본관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宋 - 용성 송씨

용성 송씨도 송씨의 시조인 중국 경조 출신으로 당 나라에서 호부상서를 지낸 송주은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계파의 하나이다.

엄경을 시조로, 용성을 본관으로 하여 26대에 이르렀다.


宋 - 은진 송씨

시조 대원은 여산 송씨의 시조인 유익의 동생 천익의 후손. 여러 대가 은진에서 살았기 때문에 은진이 본관으로 되었다.

이 밖에도 야성 송씨, 양주 송씨, 진천 송씨, 철원 송씨, 청주 송씨, 홍주 송씨 등이 송주은의 후예로서 20대에서 30대까지 계통을 이어오고 있다.

송씨이긴 하나 한자로 松씨인 성씨가 있는데, 어려서 일본에서 고아가 된 송길만이 어머니를 찾겠다며 귀환선을 타고 부산항에 돌아온 것이 1946년이었다. 부모의 성을 몰라 일본에서 부르던 송본을 그대로 신고하여 충무시에서 송씨로 하여준 것이 시조가 된 경우이다.

水씨, 洙씨, 舜씨, 淳씨, 順씨, 筍씨 등 매우 드문 희성도 있다. 그러나 이들 성씨는 전국에 2~3가구에 지나지 않는다.


承 - 연일 승씨

시조는 개다. 연일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다가 세상을 떠나 연일이 본관이 되었다.

고려 고종 때 대장군을 지내고 가문을 일으켰으므로 그를 시조로, 연일을 본관으로 삼았다.

승씨는 이 밖에도 광산 승씨가 있는데 연일 승씨에서 갈라진 것으로 본다.


昇 씨

시조는 명승. 중국 황족의 후예로 고려 공민왕 때 어머니와 함께 우리 나라로 망명하여 귀화하였다.

황족의 자손으로 망명하였다 하여 그는 물론 자손들에게도 일체 벼슬하지 말도록 일렀다.

그의 어머니 옥경화는 신라 예복인 원삼 족두리를 보급하였다. 본관은 창평, 남원의 두 본이 있다.


施 - 절강 시씨

원래 중국 성씨로 춘추 시대의 시백으로 시작하여 중국의 유명한 명문 가문으로 이끈 집안이다.

우리 나라에는 1592녀 명 나라 장군으로 임진왜란 때 지원군으로 온 시문용이 전공을 세운 뒤 귀국하지 못하고 성주에 머물러 시조가 되었다.


申 씨

신씨는 문헌에 155본으로 되어 있으나 고령, 아주, 평산 신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신씨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문벌의 하나로, 고령 신씨는 조선 전반기에 세력을 떨쳤고, 평산 신씨는 후반기에 세력을 떨쳤다.


申 - 고령 신씨

시조는 성용.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고, 검포군기감을 지냈으며, 여러 대에 걸쳐 고려의 호장으로 고령에서 살았다. 후손들이 고령을 본관으로 삼고 계통을 이어왔다.


申 - 아주 신씨

시조는 영미. 고려 말기 아주현의 권지 호장이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아주를 본관으로 계통을 이어간다.


申 - 평산 신씨

시조는 신숭겸. 전라도 곡성에서 태어나 배현경, 홍유, 복지겸과 함께 궁예를 내쫓고 왕건을 왕으로 삼아 개국 공신 대장군이 되었다.

왕건 태조의 익재 공신으로 공산동수에서 태조가 견훤에게 포위되자 대신 전사하여, 왕건이 그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 달성군 공산면에 지묘사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51대에 이르고 있다.


辛 - 염산 신씨

신씨의 시조는 중국 저성으로, 당 나라 때 천보연간(742-755년)에 신시랑이 엄시랑과 함께 사신으로 신라에 들어와서 그대로 머물러 살면서 시작되었다.

벼슬도 파락사에 오르고 나라에 충성도 하였는데, 그 뒤 계통의 기록이 없어 밝히지 못하다가, 고려 인종 때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낸 신경을 중시조로 계통을 잇기 시작해 지금 60대손까지 이르렀다.

본관은 영산, 영월로 되어 있으나 정확한 기록은 찾지 못하고 있다.


愼 - 거창 신씨

시조는 수. 중국 개봉 부인이라고 되어 있다.

고려 문종 때 아들 안지와 함께 우리 나라에 와서 귀화하여 수사도, 좌복사, 참지정사에 이르렀다.

그 후손들이 거창에 살아 거창이 본관이 되었다.


沈 - 심씨

심씨는 문헌이 63본으로 되어 있으나, 4본을 제외하고는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

심씨는 조선 500년 동안 정계를 주름잡던 10대 문벌의 하나이다.

청송 심씨는 영의정이 9명이나 되어 전주 이씨의 영의정 11명과 버금가는 세력을 떨쳤다.

역사상 3대가 나란히 높은 벼슬을 지낸 가문은 대구 서씨, 청풍 김씨, 청송 심씨의 세 가문 뿐이다.


沈 - 삼척 심씨

시조는 동노. 고려 숙종 때 좌승선과 군기소감을 지냈고, 삼척에 내려가 정착하였다.

그는 삼척 심씨로 유언을 남겨 후손들이 그대로 따르고 있다.


沈 - 청송 심씨

시조는 홍부. 고려 시대 문림랑 위위사승을 지냈으며 4대손인 덕부가 고려 충숙왕 때 왜구의 침략을 막아 공을 세웠고, 공민왕 때에는 중흥 9공신 가운데 한 사람이 나왔다.

청송군 충의백으로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청송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35대를 이어가고 있다.


沈 - 풍산 심씨

시조는 만승. 본래 중국 오흥 사람으로 천성이 곱고 예민하며 지식이 풍부하였다.

1110년 동료 복주인 호종단, 유재, 안신지 등과 함께 우리 나라에 와 풍산에 살았다.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왕의 사랑을 받았으며 태자첨사부첨사 벼슬을 지냈다.